첫 번째 수기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제가 가진 행복이라는 개념과 이 세상 사람들의 행복이라는 개념이 전혀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 저는 그 불안 때문에 밤이면 밤마다 전전하고 신음하고, 거의 발광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저는 과연 행복한 걸까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정말이지 자주 참 행운아다, 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언제나 지옥 가운데서 사는 느낌이었고, 오히려 저더러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들 쪽이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안락해 보였습니다.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이란 것이 알 수가 없어졌고, 저 혼자 별난 놈인 것 같은 불안과 공포가 엄습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이웃 사람하고 거의 대화를 못 나눕니다. 무엇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에 대한 저의 최후의 구애였습니다. 저는 인간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아무래도 인간을 단념할 수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저는 익살이라는 가는 실로 간신히 인간과 연결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필사적인, 그야말로 천 번에 한 번밖에 안 되는 기회를 잡아야 하는 위기일발의 진땀 나는 서비스였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 가족에 대해서조차도 그들이 얼마나 힘들어하고 또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지 전혀 짐작할 수가 없었고, 그저 두렵고 거북해서 그 어색함을 못 이긴 나머지 일찍부터 숙달된 익살꾼이 되어 있었습니다. 즉 저는 어느 틈에 단 한마디도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는 아이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두 번째 수기
태어나서 처음 타향에 나온 셈입니다만 저한테는 그 타향 쪽이 제가 태어난 고향보다도 훨씬 마음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제 익살도 그때쯤에는 좀 더 확고하게 몸에 배서 남을 속이는 데에 예전만큼 고심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가족과 타인, 고향과 타향 사이에는 연기하는 데 쉽고 어려움의 차이가 어떤 천재한테도, 예컨대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님한테도 반드시 존재하지 않을까요? 배우가 제일 연기하기 어려운 곳은 고향의 극장이고, 더욱이 일가친척이 모두 늘어앉은 좁은 공간에서는 아무리 명배우라도 연기 같은 것은 할 수 없지 않을까요? 그래도 저는 연기해 냈습니다.
술, 담배, 창녀, 그런 것들이 인간에 대한 공포를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상당히 괜찮은 수단이라는 사실을 저도 이윽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수단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제 소유물을 모두 팔아치워도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바침한 패자, 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동전 세 닢은 돈도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때까지 제가 맛보지 못했던 기묘한 굴욕이었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굴욕이었습니다. 필경 당시의 저는 아직 부잣집 도련님이라는 자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겠죠. 그때 저는 자진해서라도 죽으려고 진심으로 결심했습니다.
여자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살아남았습니다.
세 번째 수기
"건방진 소리 하지 마. 나는 아직 너처럼 오랏줄에 묶이는 치욕 같은 건 겪은 적이 없어."
흠짓했습니다. 호리키는 내심 저를 제대로 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겁니다. 단지 나를 죽어야 할 때를 놓친 쓸모없고 몰염치한 바보의 화신, 말하자면 '살아 있는 시체'로밖에는 생각하지 않았고, 내가 호리키의 쾌락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것만을 이용하면 그뿐인 '교우'였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저라도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호리키가 저를 그렇게 보는 것도 당연한 일인 것이, 저는 옛날부터 인간 자격이 없는 어린아이였던 것입니다. 역시 나는 호리키한테조차도 경멸받아 마땅한지도 모른다고 고쳐 생각했습니다.
요시코는 신뢰의 천재니까요. 남을 의심할 줄이라곤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로 인한 비극.
신에게 묻겠습니다. 신뢰는 죄인가요?
이제 저는 죄인은 커녕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니요, 저는 결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아아, 그렇지만 광인들은 대개 그렇게들 말한다고 합니다. 즉 이 병원에 들어온 자는 미친 자, 들어오지 않은 자는 정상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진정한 폐인.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저는 점점 더 얼간이가 되어갔습니다. 아버님이 이젠 안 계신다. 내 마음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던 그 그립고도 무서운 존재가 이젠 안 계시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텅 빈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제 고뇌의 항아리가 공연히 무거웠던 것은 아버지 탓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습니다. 모든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고뇌할 능력조차도 상실했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행복도 불행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소위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가지 진리처럼 느껴지는 것은 그것 뿐입니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갈 뿐입니다.
다자이 오사무
본명은 쓰시마 슈지(津島修治)로, 1909년 6월 19일 일본 아오모리현 쓰가루군 카나기무라에서 대지주 쓰시마 가문의 11남매 중 10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하지만 몸이 약한 어머니 대신 어려서부터 유모, 숙모, 보모의 손을 거치며 자란 탓에 정서불안을 얻게 되었다. 또한 고리대금업으로 부를 축적해 귀족원 의원에 올랐던 지방 유지인 아버지로 인해 가문에 대한 경멸을 느끼면서도 유복한 환경을 누리며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자신의 모순적 태도에 내적 불화를 겪으며 성장하였다.
다자이 오사무는 유독 아쿠타카와 류노스케를 존경하였다. 1935년 잡지 『문예』에 발표한 그의 작품 「역행(逆行)」은, 새로 창설된 제1회 아쿠타가와 상 후보작 5편에 이름을 올렸다가 낙선하는 불운을 겪었다. 이때 선고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작자는 현재의 생활에 어두운 구름이 끼어 있어, 재능을 있는 그대로 발산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는 사생활에 대한 평가를 하였다. 이에 대해 다자이 오사무는 문예잡지에 「가와바타에게」라는 글을 써서 “새나 키우고 무용이나 보는 것이 그렇게 훌륭한 생활인가”라며 되받아 공격하기도 하였다.
제2회 아쿠타가와 상 시상식에서 사토 하루오는 자신의 문하생이 된 다자이 오사무를 강력하게 지지했으나 또다시 낙선했다. 다자이 오사무는 27세가 되던 해에 “유언을 쓰는 마음으로 썼다”는 그의 첫 단편집 『만년(晩年)』을 발표하였다. 그는 아쿠타가와 상 선고에 앞서 가와바타에게 책을 보내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첨부했다. “부디 저에게 (아쿠타가와 상을) 주십시오. 바라는 것은 일절 없습니다. 깊은 경의와 비밀스러운 혈족감이 이와 같은 부탁의 말씀을 드리게 한 것 같습니다. (중략) 저에게 희망을 주십시오. 저에게 명예를 내려 주십시오. (중략) 『만년』 이 한 권만은 부끄럽지 않습니다. 저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분명 괜찮은 작품일 것입니다.”
이 글은 다자이 오사무가 깊이 숨겨 두었던 속마음을 모두 드러내 직설적으로 애원하며 쓴 것이었다. 그는 도쿄에 상경한 이후, 동반자살을 감행하였으나 자신만 살아 남았으며, 가족조차 반기지 않은 화류계 여자와 결혼했으며, 비합법 활동을 하고, 대학 조차 졸업하지 못해 취직도 실패하는 등 고향의 가족들에게는 민폐만 끼친 자신의 지난 일들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함으로써 명예를 회복하고픈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약물 중독 덕분으로 인해 불어난 빚을 청산하기 위해서라도 상금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미 후보작으로 지명되었던 작가는 선고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규정이 생기면서 후보조차 되지 못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약물 중독 증세가 더욱 심해지자 걱정하던 이부세 마스지와 주위의 동료들은 ‘결핵을 치료하기 위한 요양’이라고 속이고, 그를 무사시노 병원의 정신병 병동에 입원시켰다. 그는 한 달 후에 완치하여 퇴원했는데, “나를 인간으로도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고 했을 정도로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이 체험을 바탕으로 8년 후 『인간실격(人間失格)』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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